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킬링 디어 (균형의 논리, 카타르시스, 그리스 비극)

by ss-salli 2026. 6. 22.

영화를 보다가 "이거 그냥 호러 아닌가?" 싶다가 어느 순간 멈춰서 생각하게 되는 경험, 다들 한 번쯤은 있을 겁니다. 저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2017년작 영화 세이크리드 디어를 리뷰 영상으로 처음 접했을 때 딱 그랬습니다. 단순한 복수극인 줄 알았는데, 보고 나서 꽤 오래 생각이 따라왔습니다. 죄를 짓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는 인간, 그리고 그 인간에게 찾아오는 설명 불가능한 대가. 이 영화는 그 두 가지를 아주 냉정하게 붙잡아 둡니다.

균형의 논리: 신화가 현대 의학 드라마에 내려앉은 방식

킬링 디어의 서사 구조는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직접 가져왔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가 원형입니다. 여기서 에우리피데스(Euripides)란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3대 비극 시인 중 한 명으로, 신과 인간의 관계를 거래와 균형의 시각에서 다룬 것으로 유명합니다. 원작에서 아가멤논 왕은 아르테미스 여신의 성스러운 사슴을 죽인 죄로 원정에 필요한 바람을 빼앗기고,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기 전까지 함대를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영화에서 스티븐이 마틴의 아버지를 수술대 위에서 잃게 만든 사건이 바로 이 신성한 숲에서의 사슴 사냥에 해당합니다.

마틴이 스티븐에게 내린 조건, 즉 "당신 가족 중 한 명이 죽어야 균형이 맞는다"는 논리는 처음 들으면 황당하지만, 그게 이 영화가 의도한 불편함입니다. 이 논리를 가리켜 영화는 카타르시스(catharsis)라는 개념을 뒤틀어 사용합니다. 카타르시스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제안한 개념으로, 비극을 관람하는 과정에서 관객이 감정을 정화하는 경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관객에게 정화를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끝까지 찜찜함을 남깁니다. 저는 그 점이 이 작품의 가장 정직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의학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증상들, 즉 하반신 마비, 음식 거부, 안구 출혈이 차례로 나타나는 과정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현대 의학에서 이러한 증상군을 통칭해 기능성 신경 장애(FND, Functional Neurological Disorder)라고 부릅니다. FND란 뇌나 신경계에 구조적 손상이 없음에도 마비, 경련, 감각 이상이 나타나는 상태로, 심리적 외상이나 극단적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는 이 의학적 모호성을 의도적으로 활용해 초자연적 저주와 현실 사이 어딘가에 이야기를 걸쳐 둡니다. 저는 처음에 "이게 진짜 저주인가, 심리적 증상인가"를 계속 따지다가 결국 그 질문 자체가 핵심이 아님을 알게 됐습니다.

이 영화에서 마틴이 스파게티 먹는 방식에 대해 꺼낸 대사가 특히 오래 남았습니다. 아버지와 자신이 똑같이 포크를 돌려 면을 감는다고 했다가, 나중에 사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먹는다는 걸 알고 충격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균형이 특별한 관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주적 법칙처럼 작동한다는 것을 비유로 표현한 장면입니다. 마틴은 정의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등가교환을 원할 뿐입니다.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서사의 핵심 구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스티븐의 의료 과실: 마틴 아버지의 수술 중 사망, 책임 회피
  • 마틴의 요구: 가족 중 한 명을 제물로 바쳐 균형 회복
  • 아이들의 증상: 하반신 마비 → 음식 거부 → 안구 출혈의 단계적 진행
  • 스티븐의 대응: 인정도 반성도 없는 회피와 외면
  • 결말: 제물 이행 후 균형 복구, 그러나 스티븐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음

카타르시스와 그리스 비극: 이 영화가 불편한 진짜 이유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결국 아무도 제대로 된 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티븐은 자기 아들을 잃었지만 그것조차 자신이 선택한 죄의 대가라기보다는 눈을 가리고 총을 쏘는 과정에서 우연처럼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 장면이 정말 강렬했는데, 란티모스 감독은 스티븐이 책임을 지는 척하면서도 끝까지 그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겁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을 보고 느낀 감정은 분노보다는 이상하게 가라앉는 공허함에 가까웠습니다.

여기서 이 영화의 비극 구조가 고전 그리스 비극과 갈라지는 지점이 나옵니다. 고전 비극에서 하마르티아(hamartia)는 주인공의 치명적 결함을 의미합니다. 하마르티아란 영웅이 가진 본질적인 결함으로, 그것이 파멸의 씨앗이 되는 구조를 가리킵니다. 오이디푸스의 오만함, 아가멤논의 독선이 대표적입니다. 스티븐의 하마르티아는 명백히 자신의 실수를 직면하지 못하는 무능한 자아 인식입니다. 그런데 고전 비극이라면 주인공은 파멸하거나 통찰을 얻어야 합니다. 이 영화의 스티븐은 결말에서 마틴과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식당을 빠져나갑니다. 통찰도 없고 참회도 없습니다.

죄책감과 책임 회피가 어떻게 인간을 망가뜨리는지에 대해서는 심리학계에서도 꾸준히 연구되어 왔습니다. 수치심(shame)과 죄책감(guilt)을 구분하는 연구에 따르면, 수치심은 "내가 나쁜 사람이다"라는 자아 위협으로 이어져 오히려 회피 행동을 강화한다고 합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 APA). 스티븐의 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마틴의 아버지 죽음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더 외면하려 합니다. 의료 과실, 즉 의료인의 부주의나 실수로 환자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위는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분명한 책임 대상입니다. 국내에서도 의료분쟁 조정 및 소송 현황에 대한 통계를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매년 공개하고 있으며, 의사-환자 신뢰 관계의 핵심이 투명한 정보 공개와 과실 인정에 있다는 점이 반복적으로 강조됩니다(출처: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또 한 가지 제가 영화를 보며 꽤 오래 생각한 부분은 애나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과실을 확인한 뒤 동료 의사에게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정보를 얻고, 결국 마틴에게 발에 키스하는 복종의 몸짓을 보여줍니다. 이 장면은 신앙적 행위, 즉 성경에서 죄인이 성자의 발을 씻기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저는 이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극한 상황에서의 마지막 선택이라고 느꼈는데, 그 절박함이 오히려 스티븐의 태도를 더 공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가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인물들이 감정 없이 대화하고, 유머인지 공포인지 모를 분위기가 이어지기 때문에 처음에는 정말 거리감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 건조함이 결국 영화의 핵심 장치라는 걸 나중에 이해했습니다. 감정을 없애버린 자리에 논리만 남겨두니, 오히려 그 논리의 잔인함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구조입니다.

결국 이 영화는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단순한 도덕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제대로 벌받지 않아도 세상은 계속 돌아간다, 다만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비용을 치를 뿐이다"라는 훨씬 불편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권하기보다 "이런 감각을 버틸 수 있는 분들에게만 추천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불편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싶을 때 꺼내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2s1DoMyPCLk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블로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