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을 때, 우리는 얼마나 오래 그 빈자리를 품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저도 한동안 그 질문을 붙들고 있었는데, 아이슬란드 드라마 카틀라를 보고 나서 그 질문이 훨씬 더 무거워졌습니다. 단순한 SF 스릴러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상실과 집착, 그리고 정체성의 경계를 정면으로 건드리는 작품이었습니다.
복제인간: 화산재 속에서 걸어 나온 존재들
드라마의 배경은 아이슬란드 남부의 소도시 비크입니다. 카틀라 화산이 장기 분화를 이어가면서 마을은 사실상 폐허가 된 상태고, 남은 주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화산재와 진흙을 뒤집어쓴 채 인근 골짜기에서 한 여자가 나타납니다. 놀라운 것은 그 여자가 20년 전 호텔에서 근무했던 기록이 남아 있는 인물과 얼굴이 완전히 같다는 점이었습니다. 더구나 기록상 그 여자는 지금 이 시점에도 다른 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 드라마의 핵심 개념인 움스킵팅구르(umskiptingur)가 등장합니다. 움스킵팅구르란 아이슬란드 민간 설화에서 전해 내려오는 교체 존재, 즉 원본 인간을 대체하거나 닮은 채로 나타나는 초자연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드라마는 이 개념을 SF적 틀로 재해석합니다. 연구원 다리가 화산 표본을 분석한 결과, 화산재 속 이상 물질이 세포 복제(cell replication)를 유발한다는 가설을 제시합니다. 세포 복제란 기존 세포의 유전 정보를 그대로 복사하여 동일한 구조의 새 세포를 생성하는 현상으로, 여기서는 그 과정이 인간 전체에 적용된다는 설정입니다. 카틀라 화산이 폭발했던 200여 년 전과 100년 전에도 실종자들이 집단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이 이 가설을 뒷받침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 설정이 너무 황당하다고 생각했는데, 보다 보면 과학적 개연성보다 이 현상을 마주한 인간의 반응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정체성 딜레마
그림마의 언니 아우사가 1년간 실종된 끝에 돌아옵니다. 그런데 창고 안에서는 아우사의 시신도 함께 발견됩니다. DNA 검사 결과 시신은 진짜 아우사였고, 돌아온 아우사는 복제 존재였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한동안 멍하게 있었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웃었던 아우사는 뭐였나"라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일부에서는 이 드라마가 스웜프맨 가설(Swampman hypothesis)과 비슷한 철학적 질문을 담고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스웜프맨 가설이란 미국 철학자 도널드 데이빗슨이 제시한 사고 실험으로, 어떤 인간이 죽는 순간 우연히 그와 분자 구조가 완전히 같은 존재가 생겨난다면 그 존재를 같은 사람으로 볼 수 있는가를 묻는 개념입니다. 저는 이 가설이 카틀라의 복제 존재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고 느꼈습니다. 기억도 같고, 감정도 같고, 목소리도 같은데 원본은 이미 죽어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그 존재를 사람으로 인정하거나 거부할 수 있을까요.
드라마가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이 질문에 쉽게 답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복제 존재들 스스로도 자신의 존재 이유를 모릅니다. 그림마의 복제 인간 역시 "나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안고 있었습니다. 이런 서사 구조는 정체성을 단순히 육체나 기억의 연속성으로 규정하는 기존 시각을 흔들어 놓습니다.
주요 인물과 그들이 맞닥뜨린 딜레마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그림마: 자신의 복제 인간이 남편과 더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의심합니다.
- 기슬리: 수년째 병상에 누워 있던 아내가 건강한 복제 인간으로 돌아오자 처방약을 비타민으로 바꿔치기하는 극단적 선택을 합니다.
- 아우사: 죽은 원본과 달리 살아서 돌아온 자신이 무엇인지 끝내 확신하지 못합니다.
상실을 붙잡는 방식, 그리고 그 대가
기슬리의 이야기는 드라마에서 가장 불편하게 느껴진 부분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들을 보면서 든 생각은, 이건 단순히 나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인간이 얼마나 비이성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행동을 애도 장애(complicated grief)와 연결해 설명하기도 합니다. 애도 장애란 사별이나 상실 이후에도 정상적인 애도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장기간 극심한 고통과 현실 부정이 지속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실제로 세계보건기구(WHO)는 2022년 ICD-11 개정을 통해 지속성 복합 애도 장애를 공식 진단 항목으로 포함시켰는데, 이는 상실 후 1년 이상 일상 기능이 심각하게 손상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출처: 세계보건기구). 기슬리의 행동은 드라마적 과장이지만, 그 내면의 심리는 이 진단 기준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림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니를 1년간 찾아다니면서 마음속에 쌓아둔 죄책감과 집착은, 막상 언니가 돌아왔을 때 순수한 기쁨이 아니라 의심과 혼란으로 이어집니다. 저도 이 부분에서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보통 이런 드라마에서 실종자가 돌아오면 감동적인 재회를 기대하게 되는데, 카틀라는 그 기대를 정면으로 뒤집어 버립니다. 돌아온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상실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상실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지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됩니다.
국내 정신건강 연구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논의가 있는데, 상실 경험이 반복되거나 해결되지 않으면 생존자 자신의 정체성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분석이 있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카틀라를 두고 "단순한 미스터리 드라마"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만 보기엔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이 드라마는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 측면에서도 상당히 치밀합니다. 내러티브 구조란 이야기 속에서 사건과 인물의 감정이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연결되는지를 의미합니다. 카틀라는 복제 현상이라는 거대한 설정을 중심에 두면서도, 각 인물이 그 현상을 개인적 상실과 연결짓는 방식을 따로따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에피소드를 거듭할수록 같은 사건이 인물마다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복제 현상이 마을 전체로 확산되는 시즌 마지막 장면은 분명 강렬했지만, 이 현상이 사회적으로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지는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정부 기관의 개입이나 복제 존재의 법적 지위 같은 문제는 흥미로운 확장 가능성이 있었는데, 드라마가 끝내 개인의 내면에만 집중한 것은 의도적 선택이었겠지만 저로서는 조금 허전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던지는 핵심 질문은 오래 남습니다. 기술이 아닌 자연이 만들어낸 복제 인간이라는 설정 덕분에, "누가 만들었느냐"의 문제보다 "이 존재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로 곧장 이동하게 됩니다. 제 경험상 이런 방식으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드라마는 보기 드뭅니다.
카틀라는 정답을 주지 않는 드라마입니다. 복제 존재가 원본을 대체할 수 있는지, 상실을 붙잡는 것이 치유인지 집착인지, 그리고 내가 알던 나 자신이 사라졌을 때 무엇이 남는지를 보는 내내 혼자 생각하게 만듭니다. 아이슬란드 특유의 차갑고 황량한 풍경이 그 질문들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복제인간이라는 소재에 막연한 거부감이 있는 분이라도, 인간의 상실과 집착을 다른 각도로 들여다보고 싶다면 한 번쯤 볼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