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에서 범죄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로 둔갑하는 기사를 볼 때마다 이상하게 화가 먼저 납니다. 저도 그런 기사를 보며 "이게 말이 되나"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1995년작 영화 테러리스트를 보고 나서 그 감정이 30년 전부터 이미 스크린 위에 올라와 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법과 현실 사이에서 무너지는 한 남자의 이야기, 지금 봐도 전혀 낡지 않았습니다.
정당방위 논란, 30년 전 영화가 던진 질문
이 영화의 핵심 갈등은 초반부터 선명합니다. 중앙경찰학교를 최우수로 졸업한 신참 경찰 오수연(최민수)이 첫 출동에서 조폭의 위협에 맞서다 상대를 사망에 이르게 하고, 오히려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0년을 선고받는 장면입니다. 제가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솔직히 말해서 납득이 안 됐습니다. 명백히 위협받는 상황이었는데, 왜 법은 결과만 놓고 판단하는 걸까 싶었거든요.
여기서 정당방위(Justifiable Defense)란 형법상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먼저 위협을 받은 상황에서 이를 막기 위해 취한 행동은 처벌하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그런데 실제 한국 법원에서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비율은 극히 낮습니다.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정당방위 주장이 받아들여지는 사례는 전체 형사사건의 1% 미만 수준에 불과합니다(출처: 법무부).
영화 속 수연의 상황이 관객에게 더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공무집행 중 발생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현장의 맥락보다 결과가 우선시됩니다. 댓글에서 "30년이 지나도 정당방위가 없다는 게 레전드"라는 반응이 쏟아지는 것, 저는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뉴스를 켜면 비슷한 판결이 나오니까요.
90년대 느와르 장르의 질감, 최민수라는 배우
테러리스트는 한국 느와르(Film Noir) 장르의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입니다. 느와르란 어두운 도시, 도덕적 모호함, 폭력과 절망이 교차하는 서사 구조를 가진 영화 장르를 말합니다. 1940~50년대 미국 영화에서 시작됐지만, 한국에서는 1990년대 들어 범죄·조폭 소재와 결합하며 독자적인 색채를 입히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역시 최민수라는 배우의 존재감이었습니다. 담배 연기, 차가운 골목, 거칠게 부딪히는 대사들이 90년대 특유의 질감을 만들어내는데, 그 한가운데 최민수가 있습니다. 특히 다친 몸으로도 싸움을 멈추지 않는 장면들은 단순한 액션이 아니라 억울함이 몸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영화가 많은 관객에게 "최민수의 인생 영화"로 기억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단순히 강하고 멋있는 캐릭터가 아니라, 제도에 짓밟힌 사람의 분노와 슬픔을 몸으로 표현하는 연기가 남달랐습니다. 이경영이 연기한 형 사현 역시 냉정하면서도 동생을 향한 감정이 균열을 일으키는 지점에서 영화의 온도를 올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두 형제가 술잔을 앞에 두고 나누는 대사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았는데, "네 앞에 놓인 인생처럼 오직 너만이 채울 수 있다"는 말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처럼 들렸습니다.
법과 정의의 괴리, 이 영화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
영화의 또 다른 축은 내외 그룹이라는 조직화된 범죄 집단과 이를 묵인하거나 방조하는 시스템입니다. 형 사현은 증거를 확보하고도 수사지원을 거절당하고, 황 기자는 내외 그룹의 비리를 폭로하려다 위협을 받습니다. 제도 안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번번이 벽에 부딪히는 구조가 반복되면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수연의 선택에 공감하게 됩니다.
여기서 공권력 남용(Abuse of Authority)이라는 개념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공권력 남용이란 국가나 기관이 보유한 합법적 권한을 사적 이익이나 특정 세력을 위해 잘못 사용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영화 속에서 경찰 조직이 민생치안보다 정치적 판단으로 수사를 막는 장면은 이 개념을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단순한 복수극을 넘어섭니다. 수연의 행동은 법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개인이 정의를 집행하려는 시도로 읽힙니다. 이를 일부에서는 자력구제(Self-Help)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자력구제란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당사자가 스스로 권리를 실현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법치주의 사회에서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지만, 제도가 기능을 상실했을 때 이것이 얼마나 강력한 유혹이 되는지를 이 영화는 솔직하게 보여줍니다.
이 영화가 지금도 회자되는 핵심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정당방위 불인정이라는 현실적 법 감정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점
- 조직화된 범죄와 제도적 방조를 구체적으로 묘사한 서사 구조
- 최민수, 이경영 등 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
- 90년대 한국 느와르 특유의 도시적 질감과 분위기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에 따르면 테러리스트는 원작인 이현세의 만화 카론의 새벽을 바탕으로 제작됐으며, 개봉 당시에도 사회 비판적 시각으로 주목받은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솔직히 말하면 저도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통쾌함과 찜찜함 사이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수연이 자신을 공격했던 칼잡이를 찾아가 되갚아주는 장면에서는 분명히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꼈습니다. 카타르시스란 억눌린 감정이 극적 체험을 통해 정화되는 효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론에서 제시한 개념입니다. 이 영화는 그 카타르시스를 노골적으로 건드립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 영화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결국 남성적 폭력과 의리의 문법에 기댄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법과 제도의 실패를 비판하면서도, 그 해법을 개인의 주먹과 복수에서 찾는 구조는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다소 단순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류의 영화들은 분노를 증폭시키는 데는 탁월하지만, 제도적 해결책에 대한 고민을 오히려 우회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것은, 영화가 담아낸 감정 자체가 시효를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여전히 공감을 얻는 사회적 현실이 남아 있는 한, 이 영화의 질문도 계속 살아남을 것입니다.
아직 테러리스트를 보지 않으셨다면, 단순한 90년대 액션 영화라는 선입견 없이 한번 보시길 권합니다. 묵직하게 남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