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베이비 레인디어 (실화각색, 트라우마, 동정, 트라우마)

by ss-salli 2026. 6. 18.

피해자가 있고 가해자가 있고, 이야기가 해결되면 끝나는 구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댓글들을 읽다가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가 실제 피해 당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저는 잠깐 멈칫했습니다. 넷플릭스 미니시리즈 베이비 레인디어는 그런 드라마입니다. 보고 나서 시원한 감정이 남지 않는, 오히려 더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실화 각색이라는 말이 다르게 들린 이유

일반적으로 "실화 기반 드라마"라고 하면 사건을 재구성한 극화 작품 정도로 받아들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베이비 레인디어는 작가이자 주연 배우인 리처드 가드(Richard Gadd)가 자신이 실제로 겪은 스토킹 피해와 성폭력 트라우마를 직접 각본으로 쓰고 무대에 올린 1인극을 원작으로 합니다. 이 1인극이 에든버러 프린지(Edinburgh Fringe) 페스티벌에서 초연되었는데, 에든버러 프린지란 매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공연 예술 축제로, 신진 예술가들이 파격적인 형식의 작품을 선보이는 무대입니다. 자신의 상처를 공연으로 만들어 수천 명 앞에서 연기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격적이었는데, 넷플릭스 드라마로 재탄생하면서 다시 한번 그 기억을 꺼내 직접 연기했다는 점이 제 경험상 단순한 "용감한 결정"으로는 설명이 안 됐습니다.

자기노출 치료(Self-Disclosure Therapy)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자기노출 치료란 트라우마 경험을 언어화하거나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심리적 고통을 완화하는 치료적 접근 방식을 말합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 방식이 회복에 효과적일 수 있다는 의견이 있지만, 동시에 재외상화(Re-traumatization), 즉 트라우마를 반복적으로 되살리면서 오히려 증상이 악화되는 위험도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리처드 가드가 이 작품을 만들면서 어느 쪽에 더 가까웠을지, 저는 인터뷰를 찾아보면서도 쉽게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트라우마가 판단력을 흐리는 방식

이 드라마에서 제가 가장 불편하게 느낀 건 피해자인 도니가 마사의 스토킹을 6개월이나 신고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특히 도니가 과거에 대리언이라는 코미디 작가에게 성착취를 당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반응을 트라우마 유대(Trauma Bonding)라고 설명합니다. 트라우마 유대란 학대나 착취적 관계 속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오히려 심리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자존감이 바닥난 상태에서는 자신을 집착하는 사람조차 "나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설명은 책에서 읽을 때는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실제 드라마에서 보면 얼마나 그게 잔인한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체감하게 됩니다.

베이비 레인디어가 불편한 이유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도니는 피해자이지만,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를 위험한 관계에 내버려두는 선택을 반복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화가 나다가도, 저는 그게 도니의 약함이 아니라 트라우마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걸 이해하게 됐습니다. 이 드라마가 피해자를 완벽하고 선한 존재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점, 그것이 오히려 더 현실적이었습니다.

국내 스토킹 피해 실태를 보면, 피해자가 즉시 신고하지 않는 경우가 상당수를 차지하는데 그 이유로 "신고해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 "관계가 더 악화될까 봐" 등이 꼽힌다고 합니다(출처: 여성가족부). 도니의 선택이 단순히 드라마적 장치가 아니라, 실제 피해자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가해자를 동정하게 만드는 구조가 불편한 이유

일반적으로 스토킹 범죄물은 가해자를 명확하게 악인으로 그립니다. 그래야 피해자에 대한 공감이 깔끔하게 유지되고, 시청자도 편하게 감정을 정리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베이비 레인디어는 그렇게 쉬운 길을 가지 않습니다. 마사는 분명 스토킹 전과가 있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가정 환경에서 결핍을 안고 살아온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이 점이 저는 솔직히 처음에는 불편했습니다. 가해자의 사연을 들으면서 연민이 생기는 게, 자칫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식의 해석으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가 들었습니다. 전문 용어로는 이를 피해자화의 모호성(Victimhood Ambiguity)이라고 부릅니다. 피해자화의 모호성이란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서사 안에서 의도적으로 흐려지는 방식을 말하는데, 이 방식이 잘못 사용되면 실제 피해자에 대한 공감을 희석시키는 역효과를 낳기도 합니다.

다만 저는 이 드라마가 마사를 이해시키려는 것과 용서하게 만들려는 것을 구분하고 있다고 봤습니다. 마사의 행동은 드라마 내내 명백히 잘못된 것으로 그려지고, 결국 법정에 서게 됩니다. 그 틀 안에서 그녀가 왜 그렇게 됐는지 보여주는 것은 가해 행위를 정당화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이 드라마가 단순한 범죄물이 아닌 이유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주목할 만한 구성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피해자인 도니 역시 트라우마와 자기혐오로 인해 위험한 관계를 반복하는 불완전한 인물로 묘사됨
  • 가해자 마사에게도 결핍의 서사가 부여되어 단순한 악인 구도를 거부함
  • 성폭력 피해 이후 나타나는 약물 의존, 관계 회피 등의 반응이 현실적으로 묘사됨
  •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가 실제 당사자로, 작품 전반에 자전적 무게감이 내재됨

실화 드라마가 가진 한계와 가능성

이 드라마는 분명 잘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런 종류의 실화 기반 작품은 보는 사람의 감정 상태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이 크게 달라집니다. 스토킹이나 성폭력, 트라우마와 관련된 직간접적인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상당히 힘들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단순히 충격적인 내용 때문이 아니라, 감정선을 매우 깊게 파고드는 방식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내러티브 노출 치료(Narrative Exposure Therapy)라는 개념이 있는데, 여기서 내러티브 노출 치료란 트라우마 경험을 이야기 구조 안에 배치하여 그 사건에 부여된 감정적 의미를 재구성하는 심리치료 기법입니다. 이 드라마는 의도했든 아니든 그 구조와 유사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도니가 자신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마사를 이해하려 시도하고, 결국 일상으로 돌아오는 흐름은 치료적 서사 구조와 닮아 있습니다.

다만 이 작품을 시청할 때 주의가 필요한 이유도 있습니다. 성폭력 및 스토킹 피해 경험이 있는 시청자라면 심리적 불편감이나 플래시백 반응이 나타날 수 있으며, 전문가들은 이런 콘텐츠를 접할 때 자신의 심리 상태를 먼저 확인할 것을 권고합니다(출처: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이건 드라마의 결함이 아니라, 이 작품이 그만큼 날 것 그대로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베이비 레인디어는 보고 나서 뭔가 해소되는 드라마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결핍과 트라우마, 그리고 그것이 관계를 어떻게 뒤틀어 놓는지를 오래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실화를 직접 쓰고 연기한 리처드 가드의 용기가 작품의 무게를 만들어낸 것이고, 바로 그 이유에서 이 드라마는 단순히 "재밌는 넷플릭스 드라마" 이상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스토킹이나 트라우마를 소재로 한 작품에 관심이 있다면, 마음의 여유가 있는 날에 보시길 권합니다. 가볍게 틀었다가 생각보다 무거운 감정을 안고 끄게 될 수도 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7XdRp5L79dU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블로그 이름